Movement image;

이 페이지는 운동 이미지를 모아두는 페이지입니다. 운동 이미지란 춤,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는 것, 키스, 회전 초밥, 좋은 날씨, 떨어지는 잎들, 코인 세탁소 그리고 관람차 같은 것들입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이 페이지는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와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들뢰즈를 싫어합니다.)

this page is for movement images. Movement images include things like dancing, crossing from one side to the other, kissing, conveyor belt sushi, nice weather, falling leaves, a coin laundromat, and a Ferris wheel.(Just in case, this page has nothing to do with Deleuze's movement images. I hate him.)





Any-instant-whatever;
근대 과학 혁명의 핵심은 운동을 특권화된 순간들이 아니라, 범용한 어떤 순간에든 any-instant-whatever 관계시키는 데에 있었다. 비록 운동이 여전히 재구성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형식적인 선험적 요소들(포즈들)로부터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물질적 요소들(단편들)로부터 재구성되었다. The modern scientific revolution has consisted in relating movement not to privileged instants, but to any-instant-whatever. Although movement was still recomposed, it was no longer recomposed from formal transcendental elements (poses), but from immanent material elements(section).

découpage;
커팅(데쿠파주)은 쇼트의 결정이고, 쇼트는 닫힌 체계 안에서, 세트의 요소들 또는 부분들 사이에서 확립되는 운동의 결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운동이 세트와는 질적으로 다른 천제와도 관련된다는 것을 보았다. 전체는 변화하는 것이다 — 그것은 열린 것 또는 지속이다. 따라서 운동은 전체의 한 변화를, 또는 이 변화의 한 단계, 한 국면을, 하나의 지속 또는 지속의 접합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운동은 안과 밖,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두 면을 갖는다. 그것은 부분들간의 관계이고 전체의 성정이다. Cutting(Découpage) is the determination of the shot, and the shot, the determination the movement which is establishedin the closed system,between elements or parts of the set. But we have seen that movement also concerns a whole which is qualitatively different from the set. The whole is that which changes - it is the open or duration. Movement thus expresses a change of the whole, or a stage, an aspect of this change, a duration or an articulation of duration. Thus movement has two facets, as inseparable as the inside and the outside, as the two sides of a coin : i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parts and it is the state [affection]of the whole.

montage;
몽타주는 연속성들, 커팅과 거짓 연속성들에 의한 전체(베르그송의 세 번째 수준)의 결정이다. 에이젠슈테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몽타주란 영화의 전체, 이념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왜 전체가 몽타주의 대상이어야만 하는가? 영화의 시작과 종결 사이에서 무엇인가 변화하며, 무엇인가가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 변화하는 전체, 이 시간 또는 지속은 그것을 표현하는 운동-이미지들과의 관계 속에서 간접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몽타주는 그들로부터 전체를 풀어 주도록 운동-이미지들과 그것들의 관계들로부터 연역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간접적인 이미지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몽타주는 뒤에 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전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일차적이어야 하고, 그것이 전체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요하다. Montage is the determination of the whole (the third Bergsonian level) by means of continuities, cutting and false continuities. Eisenstein continually reminds us that montage is the whole of the film, the Idea. But why should the whole be the object of montage? Between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a film something changes, something has changed. But this whole which changes, this time or durati.on, only seems to be capable of being apprehended indirectly, in relation to the movement-images which express it. Montage is the operation which bears on the movement-images to release the whole from them, that is, the image of time. It is a necessarily indirect image, since 'it is deduced from movement-images and their relationships. Montage does not come afterwards, for all that. Indeed, it is necessary that the whole should be primary in a certain way, that it should be presupposed.